파주의 아름다운 얼굴 (81) 유라시아 횡단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수정 : 2018-12-07 11:59:55
파주의 아름다운 얼굴 (81) 유라시아 횡단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유라시아 실크로드가 만든 평화운동가
-14,500km 유라시아 횡단한 통일마라토너
시민과 함께 평화보도행진
지난 12월 1일 1시반경 파주 문산 마정초등학교에 200여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의 마지막 종착지인 임진각까지 함께 도보행진을 하기 위해서였다.
강명구 마라토너(57년생) 는 이날 아침 파평중학교에서 마정초교까지 12.8km를 달려 10여명과 함께 도착했다. 환호 환호!! 겨레하나 파주지부 안재영대표는 통일을 기원하는 한반도가 그려진 풍선을 나눠줬다.
전날 강명구 마라토너는 파주 헤이리 논밭예술학교에서 하루를 묵었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의 파주 방문을 환영하는 파주환영단이 숙소와 식사를 준비했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파주환영단에는 겨레하나 파주지부, 통일로가는평화의소녀상추진위, 파주언론사협회, 논밭예술학교, 예술로통하다꼴통협동조합, 평화마을만들기, 파주이주노동자센터샬롬의집, 파주환경운동연합, 원불교 파주교당이 함께했다.
마정초교에서 원불교의 환영기도회를 마친 후, 강명구 마라토너와 ‘평화통일기원 강명구 유라시아평화마라톤과 함께 하는 사람들(대표 이장희. 이하 평마사)’ 회원과 시민들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 ‘서울에서 평양까지’ 노래를 부르며 임진각 망배단에 도착했다. 평마사 일원인 김봉준 화가의 그림이 그려진 노란 긴 플랭카드를 든 시민들의 발걸음은 평양을 향해 가는 듯했다.
▲ 강명구 마라토너를 환영하는 파주 환영단이 환영플랭카드를 만들었다.
임진각 망배단에서 환영식
강명구 마라토너는 2017년 9월 1일부터 남북평화 통일을 염원하며 네덜란드 헤이그를 출발했다.
작년 9월은 북미간에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발사를 둘러싼 신경전은 핵버튼 운운하는 극한 긴장과 말전쟁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그 때 강명구 마라토너는 두 다리로 유라시아를 관통하여 북한을 가로질러 서울로 돌아온다는 계획을 세우고, 헤이그로 갔다. 그 엄혹한 시기에 그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14개월을 매일 40여km를 달리며, 독일, 터키, 중국 등 총 16개국의 나라를 거치며 14,500km를 달렸다. 401일째 되는 11월 7일 중국 단둥에 도착했으나, 북한의 입국허가를 기다리다가 끝내 북한을 통과하지 못했다. 결국 11월 15일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동해항에 도착했고, 고성, 철원, 연천을 거쳐 11월 30일 파주에 도착했고, 마지막 종착지인 임진각에서 경기도가 주최한 ‘2018 불어라, 평화의 바람’ 환영행사가 열렸다.
임진각에서 강명구 마라토너는 말했다. “여러분과 손잡고 넘어가서 함성을 지르고 손잡고 노래 부르면서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기회가 오면 꼭 신의주-평양-광화문-부산까지 달리겠습니다.” 이화영 경기도 평화부지사의 격려사에 이어 경기민예총의 비나리와 남북띠잇기 환영행사를 한후, DMZ생태관광지원센터에서 축하공연과 토크쇼가 열렸다.
▲ 강명구 마라토너 단둥에서
중년 사춘기를 거치며 마라토너가 되다
강명구씨는 서울에서 태어나 평범한 회사원으로 일하다 33세에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갔다. 한국에서보다 더 잘 먹고 잘 살자 결행한 이민이었다. 가게 점원, 쇼핑몰 계산원 등 갖가지 일을 하며 열심히 살다, 자동차 부품상을 하며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그래서 52세에 시작한 마라톤. 30여 차례 공식 마라톤 완주를 했고 두 차례 50마일 산악마라톤을 달렸다고 한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단순히 건강을 위해서 달렸는데, 마라톤 대회에 참석하다보니 여행하고 연결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라톤을 계속하게 되었죠. 그리고 뛰면서 무아의 지경에 빠지면서, ‘선’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닐까? 꼭 좌선을 해야 명상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달리기 명상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명상에 대해 공부를 하고 싶어 찾아간 것이 원불교였습니다.”
▲ 이화영 경기도 평화부지사가 파주환영단과 함께했다
'남북평화통일, Reunited Korea' 슬로건을 내걸고
강명구씨는 50이 넘어서 결혼했다. 항공사 스튜어디스 출신 태국 여성과 채팅을 하며 알게되어 만나다가 부인이 미국으로 들어와서 결혼했다. “한국여자들과 데이트를 해봤는데 어머니 아버지 얘기하면 다 떠나는데, 이 여자는 당연히 모셔야죠라고 했어요. 제 나이 50인데 부모를 떠보낼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너무나 고맙죠. 인물도 좋고, 영어도 저보다 나아요”
그러던 부인이 결혼한 지 5~6년이 되었는데 향수병에 걸렸다. 심한 향수병이었다. ‘태국에서는 여기보다 더 잘 먹고 잘 살았다’며 태국에 가자고 했다. 강명구씨는 부인을 따르기로 했다. 그 후 “미국에 25여년을 살았는데, 보름짜리 휴가를 한 번도 못지내봤다. 중년 사춘기도 오고, 나 혼자 사막을 달리면서 이모작 인생을 설계해겠다”고 부인과 얘기를 한 후 미대륙 횡단 마라톤을 시작했다. 그 때가 2015년이었다.
강명구씨는 솔직하게 말한다. “그 때만 해도 평화통일이 안중에도 없었구요. 유모차가 허전해서 남들 보이는데 의미를 붙이고 싶어서 슬로건을 내걸었어요. 다른 사람은 당뇨병 퇴치, 소아암과 난치병 돕기 등을 내걸어서 저도 그냥 생각난 것이 ‘남북평화통일’이어서 그렇게 한글로 쓰고, 밑에는 영어로 Reunited Korea라고 쓰고 달렸지요.”
이 미대륙횡단 마라톤은 강명구씨의 인생을 확 바꿔놓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출발해 모하비 사막을 뚫고 로키 산맥과 애팔래치안 산맥을 넘은 3개월의 여정을 끝내자, 그는 평화마라토너가 되었다. 강명구를 모르던 사람들도 평화마라토너를 기억해주었다.
▲ 강명구 환영식에 모인 파주환영단
통일마라토너가 되어 한국 1,879km를 달리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처럼 저를 통일마라토너라고 불리워지면서 제 인생의 물꼬가 바뀌어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죠.” 미대륙을 횡단하고 통일마라토너가 되버린 그가 말했다.
“부인은 태국으로 보내고, 로스엔젤레스로 가서 마라톤을 해서, 통일마라토너가 되었는데 태국을 쫓아갈 수 없잖아요. 통일 마라토너가 태국에 가서 할 일이 없잖아요.” 그가 한국행을 택한 이유이다. 다행히 부인도 이해하고 흔쾌히 동의해서,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한국으로 들어왔다.
2015년 7월 이번에는 유모차 앞에 ‘남북평화통일 전국일주마라톤 1879km’라는 배너를 내걸고, 광화문광장을 출발해 임진각으로 올라간 뒤 휴전선을 지나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을 돌아 전국을 일주하며 진도 팽목항의 세월호 유가족도 만났다. 이후 사드철수를 외치는 경북 성주 소성리 마을을 출발해 서울 광화문에 오는 ‘평화 마라톤 순례’에도 참가하고, 제주 강정마을을 출발해 성주를 거쳐 시청 앞 광장까지 가는 평화 마라톤 행사에도 참가했다.
“벚꽃 흐드러진 날, 15만이 모여 대동강에서 맥주 축제하자”
14,500km를 달려 유라시아를 횡단한 영웅
강명구씨가 미대륙을 횡단한 이후 기자에게 생각없이 말했던 ‘다음 목표는 유라시아 횡단’이라는 말이 뇌리에 남아있었지만, 미국은 단일 언어를 쓰고 치안이 안전한 나라여서 엉겹결에 횡단을 했지만, 유라시아 횡단은 많은 나라의 국경을 거쳐야 하고, 역사와 언어가 달라 도저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달리기 명상을 연구하면서 프랑스 은퇴기자가 쓴 [나는 걷는다]라는 책을 도서관에서 읽었다. 실크로드인 이스탐불에서 시안까지 3년에 걸쳐 걸었다는 에세이였다. 이 책을 보고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다. 목숨 안걸어도 되겠네.”라고 결심하게 되었다. 이제 그의 유라시아 횡단 계획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뭉쳤다. ‘평화마라토너 강명구와 함께 달리는 유라시아대륙 횡단 평화마라톤 조직위원회’를 만들었고, 30여개 시민사회단체뿐만 아니라 송영길 민주당 의원과 이재명 당시 성남시장도 후원을 했다. 카카오 스토리펀딩에서도 시민들이 후원했다.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출발한 이유는 “이준 열사가 못이룬 자주독립의 꿈을 제가 바톤 터치해서 이루겠다는 꿈을 가졌어요.”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동행차량이 없어 유모차에 모든 것을 싣고 혼자 달려야 했다. 터키를 거쳐오며 개에 물리기도 했고, 숙소를 잡지 못해 멀리 돌아가기도 했고, 먹은 게 탈이나서 장염에 걸리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14개월을 매일 40km를 달렸다. 그 와중에 페이스북에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라는 장문의 에세이를 128회 연재하였다. 이 에세이에는 강명구 마라토너의 뜨거운 열정과 잔잔히 흐르는 여린 마음과 외로운 중년의 연륜이 흐른다.
▲ 강명구 마라토너는 유라시아를 횡단하면서 지역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대동강 맥주 축제를 꿈꿉니다”
“인간으로서 힘들고,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매일 42.5km씩 평양에 가까워진다는 생각이 저를 등 떠밀어서 왔습니다. 만약 여기 혼자 쓸쓸하게 들어왔다면 좌절이었겠지만, 여러분이 저를 일으켜 세워주셔서, 여러분과 함께 북한으로 달릴 큰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는 환영토크쇼에서 말했다. 혼자가 아니라 같이 북으로 가자고. 그리고 또 하나의 꿈을 말했다. “대동강 맥주 축제했으면 좋겠습니다. 남한 5만명, 북한 5만명, 재외동포와 세계인들 5만명. 15만명이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날 대동강변에서 무박2일로, 이념을 넘어 국가를 넘어 평화의 행진을 해봤으면 하는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그는 이제 오는 봄에 북남을 거쳐 달릴 거라는 희망에 차있다.
“유라시아는 스타의 산실이예요. 유라시아를 지나온 사람은 모두 스타가 됩니다. 유라시아를 넘어온 비단은 100배의 가격으로 팔립니다. 유라시아를 넘어온 상인은 상이 됩니다. 유라시아를 넘어온 승려는 고승이 됩니다. 유라시아를 넘어온 장군은 대 황제가 됩니다. 유라시아를 넘어온 사람은 모두 스타가 되는데, 유라시아가 저를 평화운동가로 만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길을 거역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넘을 수 없는 장벽은 없다는 것을 14개월의 유라시아 횡단 마라톤으로 보여주었다. 그를 보며 우리는 남북의 장벽, 북미의 장벽을 거뜬히 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강하게 갖게 된다.
보라! 대한국인이 유라시아를 넘어 두 발로 달려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임현주 기자
#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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